김정연 - 수심가 , 초한가



서도소리 외길 한 평생 명창 김 정 연 :

서도(潟)소리는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소리이다. 조선 말엽부터 해방공간에 이르기까지 한때 소리하면 서도소리를 꼽을 정도로 번성하던 시기도 있었으나 이후 쇠퇴하여 그간 몇몇 인물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희생으로 전통을 이어왔다. 다행히 근래에 사단법인 서도소리보존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옛 영광을 되찾으려는 노력과 힘이 모아지고 있다.

서도소리의 본 고장이라 할 수 있는 북한에서는 남북분단 이후 서도소리를 포함하여 전승이 거의 단절된 상태라고 한다. 혁명 이데올로기 색채가 짙어지면서 오랜 전통은 끊어지고 악기도 변형되는등 북쪽의 문화를 오히려 남쪽에서 유지, 보존하고 있는 셈이다. 그간 서도소리의 취약성은 우선 지역적 거리감에서 비롯된다. 어린시절 또는 성년이후 서도소리를 향유하던 피난민 계층은 많은 경우 월남이후 생활에 쫓기는 동안 자연히 관심이 멀어졌고 그나마 세상을 떠나면서 기반이 취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 판소리, 사물놀이등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우리 문화상품의 하나로 세계화에 접어들고 있고 지방자치단체 출범이후 각 지역색채가 강조되다보니 자연히 지역연고가 없는 서도소리는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다. 음악자체가 "어렵다"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또한 보급에 걸림돌이 된다. 남쪽에서 육자배기가 이름있다면 서도소리에서는 수심가가 단연 평안도 사람들의 애창곡인데 많이 듣고 부르면 어려운 곡이 아니련만 접할 기회가 적으니 그러한 인상이 짙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서도지방은 오랜 세월 중국대륙에 접하여 나라를 지켜온 고장이라 서도소리 또한 꿋꿋하고 씩씩한 기상이 어리어 있다. 민요, 시창, 입창, 좌창, 잡가, 송서등 다양한 민속악이 중심이 된 소박한 민중의 소리로서의 서도창은 우선 목쓰는 법이 다양하다는 특징이 있다. 아랫배 깊숙한 부분에서부터 목을 떨면서 내는 세고 여린 음, 곱고 구슬프게 눌러 떨어내는 소리, 가는 세청과 강한 속청 그리고 콧소리가 섞이는가 하면 음을 올리고 내리는 촉급성등과 탄식조의 가락은 빠른 속도에서는 동적이며 경쾌하고 느릴 경우 부드럽고 구성져 구슬픈 분위기를 자아내는등 실로 다채롭고 감칠맛 나는 느낌을 준다.

서도소리의 대표는 愁心歌. 17세기 이후 크게 성행한 이 소리는 울분과 원망, 청승스럽고 애절한 가락으로 우리 민족정서의 한 원형질을 드러내 보인다. 그렇기 대문에 서도소리하면 이내 수심가를 떠올릴 정도였는데 19세기 후반에는 남도지방까지 파급되었다고 한다. 수심가 이외에 긴아리, 安州 哀怨聲, 山念佛, 難逢歌, 夢金浦 打令등이 이름있는데 이 민요들은 대부분 악기반주없이 부르는 徒歌형식이 많아 누구나 쉽게 익힐수 있는 대중성이 있다고 한다.

서도소리 전통예술은 소수의 명창, 예인들에 의하여 연면한 명맥이 이어져 왔는데 여기에는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29호 서도소리 보유자로 지정된 김정연(1913∼1986) 선생의 외길 인생을 빼놓을 수 없다. 서도명창 김칠성 ("두루미"라는 별명으로 평양, 남포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배뱅이 굿으로 유명)으로부터 서도소리를 배웠고 1929년 이승창으로 부터 가곡, 가사를 사사받고 1934년 이장산에게 고전무용과 황해도 향토무용을 배운 김정연 선생은 소리, 춤에 모두 능한 타고난 예인. 1959년 서도민요 긴아리등을 음반취입하였으며 서도소리 "關山戎馬"와 "수심가"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후 서도소리 전수활동에 주력하여 1972년 서도소리 음반을 내고 1986년 작고하기까지 다방면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서도소리를 재정립한 여류명창으로 큰 공적을 남겼다.

김정연 선생은 자신의 재력으로 정기공연, 책자발간 (1979년 「서도소리 대전집」간행), 해외공연, 음반취입등 전방위 활동으로 자칫 끊길뻔 하였던 서도소리의 전통을 잇고 체계를 잡아 오늘의 중흥기로 접어들게 한 공로자였다는 것이 제자 이춘목 (서도소리 예능보유자)의 회고. 국립국악원 근무시 김정연 선생과 인연을 맺어 제자가 되었다는 이춘목은 김정연 선생의 자부심과 제자사랑, 가냘픈 몸매에서 뿜어나오는 열정 그리고 「서도소리대전집」, 「한국무용도감」, 「빙심 시조집」 발간등 실기와 더불어 이론적으로 체계화 시킨 공로를 꼽았다.

김정연 선생과 동향, 동갑으로 함께 서도소리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오복녀 선생과는 여러 인연으로 얽혀 우리나라 서도소리 진흥의 견인차가 되었다. 김정연 선생은 1986년 작고하였으나 오복녀 선생은 몇년전 세상을 떠나기까지 만년에 이르도록 왕성한 활동을 펼쳤는데 두 사람은 음색에 있어 각기 다른 개성을 보였다. 김정연 선생은 목소리가 맑고 구르는듯한 음성인데 오복녀 선생은 허스키에 탁한 음성으로 각기 서도민요가 내포한 다채로운 특질을 자신의 개성으로 소화하여 펼쳐나갈 수 있었다.

집에서는 더없이 소박하고 평범한 어머니, 할머니였으나 무대에 오르면 왜소한 체구에서 발산되는 흥과 열정 그리고 폭발적인 힘에서 서도지방 특유의 생활정서가 비로소 구체화되었던 것은 아닐까. 김정연→ 이춘목, 한명순, 오복녀→ 김광순, 유지숙등로 이어지는 문하생들의 서도소리 보존, 활성화 의지는 그 어느때보다도 뜨겁다. 사단법인 서도소리보존회에서 주관하는 서도소리대회는 과거 이른바 비인기 분야로서의 소외와 취약을 털어버리고 본격적인 뿌리내리기를 위한 의욕적인 행사이며 김정연 선생의「서도소리대전집」에 이어 박기종의「서도소리전집(음반)」과「서도소리 가사집(책자)」, 이은관의「가창총보」그리고 한기섭의 「전통서도소리전집」같은 많은 책자, 음반의 발간 또한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국악하면 아직 어렵게만 생각하고 특히 학교교육과 매체에서의 서양음악 편중화로 국악에 소원하다가 삶의 연륜과 함께 그 애잔하고 질박한 정서가 가슴에 조금씩 와닿게 되듯 서도소리 또한 대중음악으로 인하여 벌어진 세대간 격차를 좁히면서 감정의 공감대를 이루는 "우리소리"로서의 대중화, 활성화라는 임무를 걸머지게 되었다. 김정연 선생의 선구성과 집념 그리고 역동적이었던 삶과 예술의 무게가 새삼 와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