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 일장춘몽이요 세상 공명 꿈밖이로구나…. 무정 세월이 덧없이 가니 원수 백발이 날 침노하누나…. "
89세를 일기로 타계한 서도명창 오복녀(吳福女)씨.
吳명창은 20여년간 만성 기관지염과 천식으로 고생하면서도 무대에만 서면 제자들 못지 않은 불굴의 예술혼을 불태웠다.
무대에서 쓰러질 각오로 버텨왔지만 그가 생전에 즐겨 불렀던 서도소리 '수심가(愁心歌)' 의 한 대목처럼 세월의 무게 앞에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지난달 1일 문예회관에서 열린 서울국악제에 출연한 지 닷새 만에 국립국악원에서 열린 한.일 파트너십 중요 무형문화재 공연 무대에 선 것이 치명적이었다.
제자들이 '장구채만 잡으시라' 고 한사코 만류했지만 "중요한 행사이니만큼 서도소리의 진수를 보여줘야 한다" 며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가까스로 수심가를 끝낸 고인은 거의 탈진상태였다.
하지만 입원과 퇴원을 여러 차례 반복하며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겨왔기에 돌아가시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무대에 서기 30분전 해열제.간장약을 꼭 챙겨 드시면서 힘겹게 투병해 왔지만 결국 그는 마지막 무대의 박수갈채와 환호성을 뒤로 한 채 하늘나라로 떠났다.
고인은 '대동강 물을 마시고 자란' 마지막 서도명창이었다.
평양 태생으로 서문여고 재학 중 장금화 선생에게 서도소리, 정학기 선생에게 가곡.가사를 배운 뒤 대동강 뱃놀이에 뽑혀 가는 '애기명창' 으로 이름을 날렸다.
상경 후 제일여고를 졸업한 그는 광산업을 하는 남편을 만나 3남1녀를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운명이 하루 아침에 바뀌었다. 남편은 납북됐고 세자녀는 외출 중 공산군의 폭격으로 목숨을 잃어 삼촌댁에 맡긴 아들(유응필씨)과 단둘이 피난행렬에 합류해야 했다.
피난처 대구에서는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다니며 콩나물.떡.죽 등을 파는 등 안해본 게 없었다.
젊었을 때 별명이 '키다리 아줌마' 였는데 행상을 오래 하다보니 척추가 휘어 나중엔 거동이 불편할 정도였다.
고인은 무대에 나올 때면 항상 장구를 메고 나왔다. 늙은이의 꾸부정하고 초라한 모습을 장구로 가려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들이 장성한 뒤 서울로 올라온 그는 김정연 명창을 만나 서도소리를 다시 시작했다. 50세가 훨씬 넘어서였다.
1971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된 고인은 서도민요보존회를 만들어 김광숙.유지숙.신정애씨 등 제자들을 배출했고 78년 '서도소리교본' 을 펴내 발성법과 장단을 체계화했다.
제자 김광숙씨는 "90년 평양 범민족통일음악회에 다녀오신 뒤 '난봉가' '타령' 은 형체도 없어졌다고 한탄하시며 통일이 되면 하루빨리 북한에 가서 서도소리를 전수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셨다" 고 말했다.
제자 유지숙씨는 "다정다감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소리를 가르치실 때는 절대 화를 내거나 야단치시는 법이 없었다" 며 "서도소리의 건재함을 보여줘야 한다며 공연 제의가 오면 절대 사양하지 않으셨다" 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