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립동이 황금심

어리광도 부렸소 울기도 하였소
달보러 가자고 칭얼대며 졸라도 보았소

아리아리 살짝 흥 스리스리 살짝 흥

한양천리 떠나간다
초립동이 낭군님 떠나간다

간다간다 초립동이 간다간다 초립동이
낭군님 따라간다

집안일도 하였소 들일도 하였소
친정에 가고파 남모르게 눈물도 흘렸소

열두고개 넘어간다
초립동이 낭군님~ 넘어간다

( 밀방아도 찧었소 길삼도 하였소
물명주 수건을 적시면서 울어도 보았소

고초 당초 맵다한들 시집보다 더 할손가 음

시누이도 섬겼소 콩밭도 메었소
모본단 저고리 걸오놓고 보기만 하였오

시어머니 잔소리는 자나깨나 성화로다 음 )






1922년 부산 동래(東萊)에서 태어나 13살 때인 1934년 《외로운 가로등》으로 가요계에 데뷔한 뒤, 1938년 빅터레코드사에서 《알뜰한 당신》을 발표하면서 대중가수로 이름을 얻기 시작하였다. 이후 1950년대까지 4,000여 곡을 발표하며 가요계의 여왕, 꾀꼬리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8살 때 같은 레코드사 소속이었던 《타향살이》의 가수 고복수(高福壽)와 결혼해 최초의 스타 커플로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으나 1958년 남편이 사업과 영화에 실패하면서 좌절을 겪기도 하였다. 1972년 고혈압으로 남편을 잃었고, 1996년부터 파킨슨병을 앓다가 2001년 7월 30일 사망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말부터 일본•만주•사할린섬으로 위문공연을 다니며 나라 잃은 동포들의 애환을 달랬고, 일제 말기에는 남편과 함께 '고복수와 그 악단'을 결성해 공연 활동을 펼치는 한편, 6•25전쟁 동안에도 남편과 위문단을 만들어 공연을 다녔다. 1990년 원로 연예인들의 모임인 상록회 최고위원을 지냈고, 대중문화에 기여한 공을 인정 받아 1992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대표적인 가요에는 《울산아가씨》《삼다도 소식》《뽕따러 가세》《사람팔자 몰라요》《한양낭군》《장희빈》《양산도 맘보》《화류춘몽》 등이 있다